[정규재 칼럼] 박근혜 정부, 그 언어의 모호성

입력 2016-01-11 17:57   수정 2016-01-12 05:17

필한반도 비핵화를 북핵폐기로 호도
대북 합의도, 노사정도 과잉 해석
북한 핵도발로 진실의 순간 직면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정치 언어는 고의적으로, 때로는 무의식 중에 모호성을 띠게 된다. 경제 언어조차 그렇게 변해 간다. 경제민주화는 개념 정의(定義)를 둘러싸고 큰 논란을 불렀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사용하는 언어도 관용적 논리구조에서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비전통적 통화정책’ 같은 단어들은 필시 무언가를 은폐하는 어법이다. 그래서 월가에는 ‘Fed 워처’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언어가 정치에 포섭되면 일상 언어로부터 이탈하게 된다.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말하는 것과 한국이 북핵이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달랐다. 그런데 정부는 비슷하거나 같은 단어라고 지금도 얼버무린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내세운다. 북한이 핵폭탄을 여러 개나 보유하고 있고, 각종 사거리를 가진 운반체에, 다양한 종류의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고 중국의 싸구려 침묵을 생각하면 중국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대한민국에만 적용되는 한정어로 돌변할 수도 있다. 중국이 말하는 ‘평화 통일’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불명이다.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이라고 말할 때도 그렇다. 통일 앞의 두 개 한정어는 해석이 필요하다. 평화통일은 국내에서도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인사는 “흡수통일은 안 되고, 평화적 통일은 좋다”고 말하고 다닌다. 무정견을 두루뭉수리한 언어 속에 숨기고 있는 잔머리다.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어떤 행동에도 반대한다’고 중국이 말할 때, 이 ‘행동’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호하다. B-52 출격은 여기에 포함되는지, 사드 배치는, 그리고 북한 핵에 대한 외과적 수술을 포함하는지도 해석이 다르다. 미군에 의한 핵 배낭 반입 등은 허용되는가도 명확하지 않다. 우리는 이들 중 상당 부분을 고의로 회색지대에 남겨둘 수도 있다.

이미 판명난 어법도 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시진핑은 ‘높은 수준’,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모두가 납득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결과는 박 대통령의 낮은 단계로 갔다. 물론 “국민 모두가 납득하는…”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낮은 단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대통령이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별개 문제다.

노·사·정 합의나 공무원 연금개혁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언어는 진실을 피해 나갔다. 북한과의 8·25합의도 그랬다. 북한이 유감이라고 말한 것을 한국 정부는 사과라고 둘러댔다. 그들은 나중에 ‘다친 병사들이 있으니 유감(위로)’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소위 ‘비정상적 사태’에 대해서도 그렇다. 정부는 핵실험 뒤 만 하루가 지나서야 확성기 재개를 결정했다. 지난해 노·사·정 합의에서도 언어가 겉돌았다. 처음에는 엄청난 합의처럼 공표됐다. 언론들도 맞장구를 쳤다. ‘합의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토론해보기로 합의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박근혜 정부는 매번 이렇게 모호한 언어들에 둘러싸여 돌아간다.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가는 아주 부적절했다. 전승절이라는 명칭부터가 잘못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승리를 얻어낸 것은 장제스였지 마오쩌둥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전승절이라는 명칭에 속았다. 톈안먼 단상에는 시진핑 푸틴 등 독재자들과 그 부하들만 마치 ‘어깨들’처럼 모여들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모호한 언어와 명징한 행동의 부조화였다. 그렇게 모호한 언어 속에 박근혜 정부의 친중 노선은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핵폭탄은 너무도 명징해서 더는 모호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자 그동안의 허구가 일시에 벗겨졌다.

보수 이념의 박근혜 정권에서 언어의 모호성이 극대화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돌아보면 노무현 정권에서 가장 명징한 언어를 썼다는 것도 특이하다. 언어유희는 1970년대 유럽 좌익들이 그들의 상대주의 철학을 전파할 때 극성을 부렸다. 과학을 정치와 문학 즉, 소설로 만들 때 언어의 모호성은 극대화된다. 박근혜 정부의 모호성은 장관들의 과욕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력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점이 더 걱정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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